한자는 뜻글자이므로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이름으로 쓰기에 적절치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똥 분(糞)자나 간사할 간(奸)자를 넣어 이름을 지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한자들을
‘이름에 쓰지 말아야 할 문자’라는 뜻에서 ‘불용문자(不用文字)’라고 합니다.
이처럼 불용문자는 사람의 건전한 통념에 비추어 이름에 쓰기 곤란한 문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용문자의 역사적
연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그 역사적 기원은
관련 글 링크 참조),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이러한 불용문자의 금기를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헌에 “이러이러한 한자가 불용문자”라고 적시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 선조들이 일상생활에서 이름을
지을 때 자연스레 부적절한 한자의 사용을 피해온 역사적 과정을 통해 불용문자의 금기가 형성돼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정 시기, 특정 지역만을 놓고 보면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 불용문자의 범위에 대한 생각이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략 아래와 같은 한자들이 불용문자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하에서는 불용문자의 사례를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① 그 뜻이 흉하기에 피해야하는 한자들:
假(거짓 가) 姦(간음할 간) 奸(간사할 간) 乞(빌 걸) 哭(울 곡) 狂(미칠 광) 難(어려울 난) 亂(어지러울 난) 奴(종 노) 逃(도망할 도)
盜(도둑 도) 毒(독 독) 亡(망할 망) 盲(눈 멀 맹) 犯(범할 범) 등
이 부류는 불용문자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동물이름:
犬(개 견) 豚(돼지 돈) 牛(소 우) 鼠(쥐 서) 蛇(뱀 사) 鷄(닭 계) 馬(말 마) 猫(고양이 묘) 魚(물고기 어) 鳥(새 조)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라는 말은 욕에 해당합니다. 만약 이름글자에 동물이름을 넣으면 그 사람이 동물이라는 뜻이 되기에 곤란합니다.
하지만 동물이름이라고 해도 이미지가 좋아서 그 사람을 욕되게 하는 뜻이 없다면 불용문자가 아닙니다. 龜(거북 구) 鳳(봉새 봉) 豹(표범 표) 虎(범 호)
鶴(학 학)자 등은 불용문자가 아니어서 전통시대 명망가들의 이름 중에 다수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용구(韓用龜)’는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분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작명사례를 통해 동물이름이라고 해서 무조건 불용문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혹 동물이름을 불용문자로 하는 이유가 ‘불이축생不以畜牲’을 말한 『춘추좌전』의 구절에 있다고 하면서, 모든 동물이름이 불용문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춘추좌전』의 내용을 오독한 소치일 뿐입니다(『춘추좌전』의 올바른 해석은
관련 글 링크 참조).
③ 한 개인의 이름으로 삼기에는 너무 높은 경지를 뜻하는 한자:
佛(부처 불) 仙(신선 선) 神(귀신 신) 靈(신령 령) 皇(임금 황) 王(임금 왕) 君(임금 군) 天(하늘 천) 尊(높을 존)
이러한 경우도 피해야하는 한자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佛(부처 불)자를 이름에 넣으면 “나는 부처”라고 스스로 말하는 셈이 되니 곤란합니다.
위 예시 한자 중 天(하늘 천)자 같은 경우는 예외가 있을 수 있으니, ‘이천보(李天輔)’, ‘유명천(柳命天)’은 조선시대에 영의정을 지낸 분들의
이름입니다. ‘천보(天輔)’는 하늘을 보좌한다는 뜻이며, ‘명천(命天)’은 명(命)은 천(天)에 있다, 즉 하늘의 명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이름이라면 하늘을 모독하는 뜻이 아니므로 天(하늘 천)자를 이름에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天(하늘 천)자를 불용문자로 분류한다고 해서 무조건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尊(높을 존)자의 경우는 고려시대 문과급제자 중에서는 이존비(李尊庇), 이달존(李達尊)과 같이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용례가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이 유교국가화되는 시대 상황의 변화로 인해 과거에 불용문자가 아니던 글자가 새로이 불용문자로 굳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가득 찬 숫자:
十(열 십)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모든 세상을 뜻하는 것처럼 十(열 십)은 가득 찬 숫자이기에 피해야 합니다. 동양에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로 대표되는
상수학(象數學)의 전통이 있기에 가득 찬 숫자를 이름에 사용하는 것을 꺼립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여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선다”는 것이 『주역(周易)』 이 전하는 이 세상의 순환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있듯이, 이미 가득 찼으면 앞으로는 내려갈
일만 남았기 때문에 좋은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 상수학은 1부터 10까지 숫자의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에 10을 넘어서는 숫자, 예를 들어 百(일백 백), 千(일천 천) 등은 불용문자가 아닙니다.
⑤ 가족관계 이름:
父(아비 부) 母(어미 모) 祖(조상 조) 姪(조카 질) 등
위와 같이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한자를 이름글자로 사용할 경우 가족 간의 호칭에 혼란이 생깁니다.
⑥ 맏이용 한자:
乾(하늘 건) 孟(맏 맹) 伯(맏 백) 長(길 장) 甫(클 보) 先(먼저 선) 承(이을 승) 始(처음 시) 胤(이을 윤) 前(앞 전) 宗(마루 종) 柱(기둥 주) 太(클 태)
위의 한자는 형제자매 중 맏이에게는 쓸 수 있지만, 둘째 이하에게는 쓰지 않습니다.
⑦ 둘째 이하용 한자:
小(작을 소) 少(적을 소) 低(낮을 저) 弟(아우 제) 下(아래 하) 後(뒤 후) 桂(계수나무 계) 暮(저물 모) 孫(손자 손)
위의 한자는 형제자매 중 둘째 이하에게는 쓸 수 있지만, 맏이에게는 쓰지 않습니다.
⑧ 근현대에 새로이 형성된 불용문자:
四(넉 사)
불용문자는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 경험이 누적되어 형성되는 것인데, 위의 四(넉 사)자는 전통시대에는 인명에 사용되었으므로 불용문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그 발음이 死(죽을 사)자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건물의 층수에서도 4층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작명에서도 사용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이 불용문자에 합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여러 불용문자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결국 사람의 건전한 통념에 비추어 볼 때 이름에 사용하기 곤란한 문자들이 불용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일부 상혼에 물든 작명가들이 불용문자가 아닌 한자를 불용문자라고 겁을 줌으로써 개명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光(빛 광)자는 불용문자가 아닌데 이를 불용문자라고 하면서, 아이의 이름으로 계속 사용하면 아이의 운명이 어그러진다고 부모에게
겁을 주는 식입니다(더 자세한 내용은
‘불용문자 관련 일부 사이비 작명가들의 사기 수법’ 참조).
이처럼 불용문자는 일부 상혼에 물든 작명가들이 금전에 눈이 멀어 개명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 ‘불용문자라고 주장하는 한자들’이
급속하게 늘어났고 지금도 계속 늘어나는 와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사이비 불용문자’일 뿐 본래의 불용문자가 아니니, 이런 문자를 이름에 사용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글을 달리하여
정리합니다(
관련 글 링크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