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비(相比)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에 대해서

소리오행의 상비(相比)관계는 ㅇ과 ㅎ, ㅅ과 ㅈ 등 서로 같은 오행을 지닌 자음끼리 만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링크 참조). 이처럼 같은 오행을 지닌 자음끼리 만나면 그 오행의 특질을 보다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상비관계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에 대한 길흉 판단은 해당 오행의 특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남나리’라는 이름이 있다고 하면, 화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이어서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기운은 그 본성 자체가 팽창하는 양기운이기 때문입니다. 화기운 자체가 팽창하므로 화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은 화기운의 태과(太過)에 이르게 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인지라 화기운의 태과에 이른 이름을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목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이름 역시 목기운이 태과하니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목기운인 ㄱ, ㅋ 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은 작명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면 금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서진주’라는 이름, 수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이해인’이라는 이름은 다소 편중된 느낌은 있지만 좋은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금기운과 수기운은 그 본성이 ‘수장(收藏)’하는 음기운이기 때문입니다. 수장(收藏)이란 거두어들이고 저장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밖으로 팽창하는 양기운과는 반대의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금기운과 수기운은 상비를 이룬다고 해서 그 기운이 태과에 이르는 일이 없고, 무리가 따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서진주’, ‘이해인’이라는 이름을 직접 발음해보면 무리없이 편안하게 발음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토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박보미’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습니다. 토기운은 음과 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성의 성질을 가지므로, 토기운 역시 상비를 이루었다고 해서 태과에 이르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목·화·토·금·수 각각의 상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금기운의 상비입니다.
왜냐하면 금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에 대해 “쇠와 쇠는 서로 부딪혀서 하나가 되기 곤란하다” 운운하며 좋지 않은 이름으로 평가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음양오행을 단순한 물상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유치한 견해의 소산일 뿐입니다.

음양오행에서 ‘금(金)’은 쇠가 아니라 거푸집의 상형입니다. 한자 金(금)에서 今 부분은 발음부호, 그 아래 흙 土(토), 그리고 흙 속의 두 쇳덩이 하는 식의 설명이 과거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토생금(土生金, 토가 금을 낳는다)’의 원리와 맞물려 설득력있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한자의 어원인 갑골문·금문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과거의 산물일 뿐, 이제는 학술연구를 통해 金(금)이 거푸집의 상형이라는 사실이 공인되었습니다.

한동석 선생은 금기운에 대해 설명하길, 수장(收藏)의 최초 단계로 견렴(堅斂)을 위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1)여기서 수장(收藏)과 견렴(堅斂)을 합치면 ‘수렴(收斂)’입니다. 이는 우주 만물의 순환에서 금기운의 작용이 발산을 수렴으로 돌려세우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간명하게 적시한 것입니다.
거푸집은 이러한 금기운의 수렴 작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목과 화의 단계를 거치며 발산을 거듭해온 양기운을 거푸집에 넣어 수렴시켜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기운의 상비로 이루어진 이름에 대해 “쇠와 쇠는 서로 부딪혀서 하나가 되기 곤란하다” 운운하는 설명은 폐기돼야 할 것입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창제가 천지자연의 이치(음양오행의 이치)를 따른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이치가 둘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음양오행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의 이치가 그러한 것이기에 자연스레 그리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그리 되는지 어떤지 우리 스스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예를 든 ‘서진주’라는 이름, ‘이해인’, ‘박보미’라는 이름을 직접 발음해보면 무리가 따르는 느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목이나 화기운의 상비만으로 이루어진 이름은 작명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억지로 지어낸다고 해도 발음에 무리가 따르는 것을 직접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음양오행은 자연의 이치가 그러한 것이기에 직접 느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쇠와 쇠는 서로 부딪혀서 하나가 되기 곤란하다”는 식의 억지 설명을 갖다붙인다고 해서 자연의 이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1)한동석, 『우주 변화의 원리』, 대원기획출판, 2001, 7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