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작명학이 왜곡되고 만 역사적 이유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직후 손수 그 사용례와 창제원리를 간략히 들어 보이시고는 이에 상세히 해석을 덧붙여서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셨다. 이에 정인지 등이 세종이 내리신 간략한 예의본(例義本)에 보다 상세한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1) 이리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명작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해례본’으로 약칭)은 우리의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등재되어 한국인의 귀하디 귀한 보배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은 그 탄생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의 사용례와 창제 원리, 배경철학까지를 상세히 담고 있다.

또한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2) 는 정인지의 말처럼, 관심을 갖고 정독한 사람이면 누구나 오해의 여지 없이 이치를 깨우칠 수 있게끔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해례본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오늘날 한국 작명학이 대왕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글 창제 후 약 60년이 지난 1504년에 비극이 발생했다. 조선의 제10대 국왕인 연산군이 자신의 비행을 비방하는 백성들의 눈과 귀, 입을 막으려는 의도로 ‘언문금지령’을 내리고, 한글 서책을 불태우도록 명령하는 등 탄압을 가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해례본이 그만 조선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례본이 시야에서 사라짐으로 인해 이후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헝클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잘못된 내용이 마치 정설인 양 전해졌고, 작명학 분야에서도 잘못된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천만다행으로 1940년에 해례본이 발견되고 1945년에 해방이 이루어짐으로써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작명가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잘못된 이론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작명학 분야의 낙후성 때문이다. 한국 작명학계의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다. 작명가들 중에는 새로운 발견과 이론을 검증하고 받아들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그저 고답적으로 되풀이할 뿐인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다른 분야였다면 진작에 바뀌었을 상황인데도, 작명학계에서는 여전히 잘못된 이론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작명 이력을 번복하기 싫기 때문이다. 전에 작명해준 이름이 틀렸다고 말하면 후속 책임이 따른다. 그 때문에 틀린 이론을 계속 고수하는 것이다.

이들은 작명을 해주면서 구체적인 사실을 덮은 채 쉬쉬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간다. 그 때문에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 이름을 작명하면서도 그 이름이 세종대왕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잘못된 이름임을 알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가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한국 어린이의 이름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어긋나게 잘못 작명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한국의 작명가가 한글로 이름을 지으면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분명하게 밝힌 우리의 한글 창제원리에 무지한 채, 또는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며 잘못된 이름을 계속 짓는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지난 세월은 어느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부끄러웠던 역사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진리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감춘다면 이는 역사에 큰 과오를 범하는 일이다. 또한 잘못된 이름을 지닌 채 살아갈 아이들과 부모님들께 죄를 짓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於是,臣與... 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槩。庶使觀者不師而自悟
계해년(1444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예(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2) 庶使觀者不師而自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