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태조 이성계를 이성계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

오늘날에는 흔히 ‘태조 이성계’라고 부르지만 이는 틀린 표현이다. 태조는 말년에 이름을 ‘단 (旦)’으로 개명했기 때문에 ‘태조 이단’이 맞는 표현이다.

이처럼 태조가 말년에 이르러 갑자기 이름을 개명한 이유는 ‘휘(諱)’의 풍습 때문이다. 휘(諱) 는 ‘꺼릴 휘’인데, 사망한 군주의 이름을 삼가서 부르지 않음으로써 존중하는 풍속을 가리킨다 (피휘, 기휘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풍속은 한·중·일 3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널리 행해졌다. 그러므로 군주가 사망 하고 나면 백성들은 군주의 이름글자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일례로 청나라에서는 팽가병이라는 사람이 가문의 족보를 간행하면서 건륭제의 이름을 ‘휘’하 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황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본인은 자살을 해야 했고, 집안 사람 들은 참수형을 당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당대인들에게 ‘휘’는 잘못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일로 결코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태조가 개명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 던 한자인 이룰 '성(成)'과 계수나무 '계(桂)'자를 갑자기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태조는 말년에 이르러 평생 써온 이름을 개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왕의 이름은 외자로 짓는 것이 상례였다. 고려의 경우 475년간 34대에 걸친 왕의 이름이 모두 외자였다. 조선의 경우는 두 명을 제외한 25명의 이름이 외자 였다. 백성들이 ‘휘’해야 하는 이름을 한 글자라도 줄여서 백성들의 편의를 돌보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왕의 이름글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희귀한 글자를 골라썼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도(裪)’였고, 정조의 이름은 ‘산(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당시 개성유후였던 이도분(李都芬)은 이사분(李思芬) 으로 이름을 고쳤고, 충청도의 ‘이도역(利道驛)’도 ‘이인역(利仁驛)’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금 의 이름과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이도’로 같다는 것만으로도 불충이라 인식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경우도 많이 쓰지 않는 한자인 ‘단(旦)’으로 개명했지만, ‘아단산(阿旦山)’이라는 산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아단산(阿旦山)의 단(旦)자는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바뀌어 ‘아차산(阿且山)’이 되었고, 이후 ‘阿嵯山(아차산)’을 거쳐 오늘날의 ‘峨嵯山(아차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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